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엥겔스 (문단 편집) === [[러시아 혁명]]에 미친 영향 === > 러시아 혁명이 서구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탄이 된다면 서로 보완이 될 수 있고, 현재 러시아의 공동체적 토지 소유는 공산주의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 1882년 『자본론』 러시아어판 2판 서문 상술한 것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이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었다. 그래야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이 발전하고 여타 변혁의 조건도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후대의 [[마오주의]]와는 정 반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농촌 형태의 공산주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두 사람은 아시아의 농촌 공동체는 동양적 전제주의의 부산물이며, 사회주의를 향한 세계적 차원의 진군에 장애물이 되는 시대착오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같은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러시아 제국을 후진적인 자급자족 경제를 가진 나라로 평가하였고, 서구에 앞서 먼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어날 나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1870년대 들어 서유럽에서 혁명의 가능성이 퇴조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만히 앉아서 실망만 하고 있는 대신 인류사의 초기 단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엥겔스는 미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H. 모건이 1877년 출간한 『고대 사회: 야만에서 미개를 거쳐 문명에 이르는 인류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를 읽고 원시 공산주의의 정치적 가능성을 다시 짚어보게 되었다. 이미 엥겔스는 1874년부로 러시아의 혁명 관련하여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다."는 발언을 남긴 바 있었다. 엥겔스는 1885년에는 러시아에서 조만간 혁명이 터질 것이며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는 확정적인 견해를 남겼다. 이를 반영하듯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마르크스주의 해석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계파가 나누어졌다. 하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노동해방단 일파로 마르크스주의 정통 노선 해석에 입각하여 러시아 제국이 서구 유럽의 산업화, 계급의식 발전을 뒤따라야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슬라브족]]의 전통적인 농업 공동체인 [[미르]]를 주목하고 러시아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길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쿠닌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르 헤르젠]]은 러시아 농민들이야말로 사회주의의 달성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미르에서 일하는 러시아 농민들은 천성적으로 공산주의자이므로 서유럽인들로부터 공산주의의 주도권을 빼앗아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제 조건은 노동 계급의 생활 환경이 악화되면서 일어나는 계급 의식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서유럽에서는 미국으로 이민하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구 압력이 약화되고, 대외 무역이 팽창하면서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두 사람의 살아생전 서유럽 산업사회에서는 기대했던 상황은 오지 않았다. "노동 계급이 생활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계급 의식이 급속히 발전하고 계급투쟁이 활발해지는" 상황은 19세기 말 서유럽 대신 1차대전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키이우]], [[리가]]를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이 성장했지만 그 이외의 국토 대부분 지역에서 농업인구가 우세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플레하노프의 견해와 나로드니키의 견해에 대한 정반합을 바탕으로 [[레닌주의]] 이론을 정립하고 러시아 혁명을 지휘하여 소련을 건국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이외에도 라트비아 리가를 중심으로 한 라트비아 소총연대가 맹활약했는데, 리가는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고, 라트비아 소총 연대는 이러한 리가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계 러시아인#s-2.2.3|독일계]] 유산계급과 갈등을 빚던 라트비아의 무산 계급과 지식인들이 중추가 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적백내전]]에서는 농민들이 백군 적군 모두 다 싫지만 그래도 차라리 적군이 낫다는 판단 하에 적군한테는 덜 적극적으로 저항하였고, 그 결과 적군이 승리하면서 러시아는 소련으로 거듭났다.] 러시아 혁명 관련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상 중 한 가지는 맞고 한 가지는 틀렸다. 두 사람은 러시아 농민들이 "부르주아적 소규모 자영농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좀 더 높은 단계의 사회 형태로 옮아갈 수 있다."라고 주장했지만,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으로 러시아의 전통 농민 공동체는 붕괴되었고 자영농 부농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으로 러시아 제국의 농업 생산성이 크게 개선되고 자영농민들이 재산을 축적하자 레닌은 자신의 살아생전 혁명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좌익 혁명가인 드미트리 보그로프가 보수 개혁가였던 스톨리핀을 암살하고 이후 러시아 제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면서 상황이 바뀌지만...] 다른 한편으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남긴 바 있다. "50만 지주와 8000만 소작농들을 새로운 계급으로 바꾸려면 끔찍한 고통과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잔인한 여신이다. 역사의 여신은 수많은 시체더미를 밟고 전진한다. 전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경제적 발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후일 러시아 혁명에 뒤이은 스탈린의 5개년 개발 계획, 농업 집산화를 예견한 듯한 섬뜩한 예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